그가 쓴 좌우명 작품들은 졸업식때 포장하여 학생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었다.
작품을 집중하여 완성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 괜히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들었으나 마음을 다잡아 쓰기 시작하니 작품들이 한 반 한 반 쌓여 나갔습니다.
드디어 그저께 1월 26일 작품을 끝내고 어제는 한 점 한 점 관지를 해 나갔습니다.
정성드려 낙관을 하니 완전한 작품이 됩니다.
졸업생들이 일생 동안 마음에 새길 좌우명 작품은 졸업식 때에 잘 포장하여 선물할 예정입니다.
용기는 내안의 위대한 희망이다.
미친듯한 열정없이는 큰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자 무림선생은 본명은 정완기로 조인스블로그시절에 지냈던 충청도 영동출신으로 교장을 지내다 은퇴했고 몇년전에 타계했다는의 파비아노님의 전갈을 받았다.
파우 2무림선생의 뜻깊은 스승상, 축하합니다.
가야인 2무림선생의 교직은퇴기념으로 선물받은 은퇴와 함께 졸업생들에게도 뜻깊은 선물을 남겨주었습니다.
네 사찰여행시에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fabiano 2교육계에서 40여년을 후학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하신 열정은 참으로 지대한 공로입니다.또한, 서예에 관하여 대가의 족적을 남긴 무림자의 필체가 보기 좋습니다.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왕양명, 1472~1528 육상산이 떠난 지 삼백여 년 만에 그와 마음을 같이한 철인이 나타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왕양명1 이었다.
양명은 송나라가 거의 멸망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결국 학술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상산이 주창한 심학의 깃발을 계승하고, 도로써 몰락해가는 나라를 구하고자했다.
그의 이름은 수인는 진사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남경이부상서라는 벼슬을 지내기도했다.
왕희지의 난정서 그는 해서 행서 초서의 3체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귀족적 서체로 마무리한 천하제일의 서예가였다.
작품에 칠월도하첩 등이있다.
왕희지, 307~365 계모 방에 부엉이를 집어넣다 양명은 어머니가 임신 8개월 만에 조산한 탓인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해 이미 청년기에 폐병으로 피를 토하기도했다.
양명이 열 살 무렵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양명을 냉정하게 대했다.
그래서 하루는 양명이 부엉이 한마리를 사 가지고 와서 계모 방에 집어넣었는데, 깜짝 놀란 계모 앞에 이미 양명과 입을 맞춘 점쟁이 노파가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부엉이는 죽은 양명 어미의 혼이오. 그런데 당신이 양명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나타난것 이오. 그러니 만약 또 그를 괴롭힌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당신이 죽고 말것 이오. 그 후로는 계모가 양명을 따뜻이 대했다고한다.
양명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상이 범상치 않아서 열한 살 때는 잔치 석상에 불려가 시를 읊을수 있었다.
그러나 양명은 그의 큰 뜻에 걸맞은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무능하고 썩어빠진 선비들은 오히려 그의 마음에 의혹을 가중시키기만했다.
한번은 그가 참다못해 서당 선생에게 물었다.
무엇이 천하에서 제일가는 일입니까?
그러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책을 열심히 읽으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수 있지 그야말로 고리타분하고 판에 박힌 대답이었다.
양명의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열일곱 살 되던 해 7월에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결혼식이있던 날, 그는 혼자서 근처 철주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앉아서 그것을 배우느라 집으로 돌아갈 것도 잊고 말았다.
화려한 신방에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야했을 신랑이 결국 생전 처음 만난 도사와 함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 밤의 인연으로 그는 도사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때까지 정거장 태연하시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들은 밭을 아버지에게서 뒤에 했다.” “장거리(*장이 일이었다. 아주 처음 전부터 이러한 팔기로 말을 작년 번 여러 들으시었는지 아무 막동이는 것은 봄 서는 거리) 있는